•  귀츨라프의 아시아 지역 첫 선교활동은 24세 되던 해에 인도네시아의 현재 수도(首都) 자카르타(Jakarta)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1826년 7월 20일 정식 선교사로 임명되어 같은 해 9월 15일 네덜란드의 점령지 인도네시아의 자바(Java) 섬으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1827년 1월 6일 자카르타 의 옛 지명 바타비아(Batavia)의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이곳에는 런던 선교회의 W. H. 메드허스트(Medhurst, Walter Henry)가 선교를 하고 있었는데 귀츨라프는 이 집에 여장을 풀고, 그로부터 인도네시아의 정세와 전도의 어려움에 대하여 상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귀츨라프는 아시아 지역 첫 선교지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부름 받은 것을 감사하며 선교의 꿈을 부풀렸다. 그러나 전도의 열매는 별로 맺지 못했다. 이때 동역자(同役者) 메드허스트 선교사로부터 태국의 사이암(Siam) 선교를 제안 받고 이를 기쁘게 받아드렸다. 그리하여 1828년 네덜란드 선교회 선교사직을 사면하고 태국의 수도 방콕으로 옮겨갔다.

     귀츨라프의 아시아 두 번째 선교활동 지역은 태국의 수도 방콕에서 1828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1828년 8월 23일 현재의 태국 수도 방콕의 옛 지명 사이암(Siam)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활동하던 포르투갈 영사의 영접을 받았다. 그는 1831년까지 방콕에서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소속의 J. 톰린(Tomlin, Jacob)과 함께 선교 사역을 하면서 동아시아 선교 비전을 더욱 구체화 하였다.
    귀츨라프는 유럽을 떠나기 전에 이미 중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며, 방콕에 머무는 동안 푸젠지방 통안(Tung-an)에서 온 중국인 쿠오(Kwo)씨족의 양자가 되어 중국 백성이 되었다.
    귀츨라프는 1830년 2월 11일 런던 선교회에서 일하는 뉴엘(Newell, Maria)과 결혼하였다. 이들 부부는 필생의 사업으로 성서를 태국어(Siam)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뉴엘 부인은 1831년 2월 16일 쌍둥이 딸을 낳다가 아이 하나와 함께 별세하였다. 귀츨라프는 이 충격과 건강의 악화로 같은 해 6월 중국으로 떠나며 딸아이를 싱가포르 친구에게 보내 달라고 하였는데 그 아이마저 사망하였다.
    결국 그는 아시아 두 번째 선교지 태국 선교를 시도하였으나 성과가 별로 없는데다 아내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자 실망하고, 본래 의도한 대로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귀츨라프의 아시아 세 번째 선교 활동 지역은 중국에서 1831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귀츨라프의 동아시아 선교의 꿈은 1831년부터 1833년까지 3차에 걸친 선교여행을 통하여 보다 확실히 이루어 졌다. 제1차 선교여행은 1831년 부인과 사별 후 중국 상선(Lin-Jung)을 이용 하였다. 즉 1831년 6월 3일 방콕을 출발하여 텐진(Tientsin, 天津)까지 그리고 다시 텐진에서 마카오까지 6개월간의 여정이었다. 제2차 선교여행은 1832년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암허스트호를 이용하였다.
    이 기간 중 그는 중국의 남쪽 해안 마카오에서 타이완, 상하이, 산동반도를 경유하여 한국의 서해안까지 선교 범위를 확대하고 전도여행을 계속하였다. 제3차 여행은 무장한 영국 국적의 아편 밀수선을 타고 수행되었다.
    특히 귀츨라프의 제2차 선교여행은 한국선교와 깊은 관계가 있으므로 그가 한국으로 향한 중국 해안의 여정과 활동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귀츨라프 선교사는 제2차 선교 여행의 일환으로 한국 선교를 향하여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와 태국의 방콕에서 익힌 중국어 실력으로 통역관을 겸하여 1832년 마카오(澳門)를 출발하여 아모이(廈門), 타이완(臺灣), 푸조우(福州), 닝포(寧波), 상하이(上海), 웨이하이웨이(威海衛) 등 중국 연안을 두루 경유한 다음 황해를 가로 질러 7월 17일 한국의 서해안에 도착하였다. 귀츨라프의 한국 선교를 향한 중국 해안의 항해 여정(旅程)을 살펴보면 <지도 1-1)과 같다.

    1) 마카오(Macao)에서 아모이(廈門)까지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 목사는 1832년 2월 26일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암허스트호(Lord Amherst)” 배편으로 교역과 선교를 위하여 마카오(Macao, 澳門)를 출발하여 중국 해안의 여러 항구를 지나 7월 16일 웨이하이웨이(Wei-hai-wei, 威海衛)에서 한국의 서해안에 도착하였다.
    귀츨라프 일행은 1832년 2월 27일 꽝뚱성(廣東省)을 출발하여 동아시아의 교역과 선교 개척의 본격적 항해에 나섰다, 3월 5일 마쿠니(Ma-kung, 馬崗)에 상륙하여 이곳에서는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다. 3월 9일 그이제(Kea-tsze) 만에 정박하여 제당시설 등을 시찰하였다. 이곳 주민들은 가난해 보였지만 전도지를 나누어주니 좋아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관리들은 이곳을 떠나라고 하였다. 1832년 4월 2일 푸젠성(福建省)의 아모이(Amoy, 廈門)에 입항하여 7일까지 정박하였다. 아모이 항구는 포르투갈, 스페인, 네델란드 및 영국 등의 선박이 항상 거쳐 가지만 배의 규모가 3-4백톤 정도에 불과하였으나 1천 톤이 넘는 큰 배가 온 일은 처음이라 하였다. 따라서 아모이 주민들이 이 배를 보려고 모여든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모이 관리는 항구에 들어오는 암허스트호를 향하여 대포를 발사하였다.

    2). 타이완(臺灣)에서 푸조우(福州), 닝포(寧波)까지 1832년 4월 11일부터 5일간 타이완(臺灣)에 정박하였다. 이곳은 곡창지대로 중국 본토보다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섬 안에는 원주민(高砂族)이 살고 있었으며 본토 이민에게 반항하는 일이 더러 있었으나 대체로 평화스럽게 지내고 있었다. 항구에 정박하고 있는 배는 거의 아모이 사람들것이며 땅은 비옥하고 자유 분위기가 넘치고 있었다. 귀츨라프가 전도 문서를 나누어주자 받아들고 기뻐하였다. 무역을 위한 대화 상대자는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관리가 퇴거하라는 일은 없었다. 1832년 4월 21일 타이완에서 푸조우(Fuh-chow, 福州)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한 달 동안 체류하면서 무역 상담과 지역의 정황을 자세하게 탐사하였다. 푸조우는 차(茶), 목재 등의 수출항이며, 이곳에서 상인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고 무역 상담도 하였다. 항구로부터 80km(50마일) 정도 강을 거슬러 올라가 양쪽 기슭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고국 독일의 라인 강 기슭을 보는 느낌을 가졌다. 이곳 관리들은 항의하며 퇴거를 강력히 요구하였으며 포대(砲隊)에서 위협사격도 가하였다. 그러나 귀츨라프는 관리들의 제지를 무릅쓰고 거리를 거닐면서 관청을 찾아가 무역 상담을 진행하였다. 가톨릭 신자를 방문하여 대담 하고, 회교도를 만나 현황도 조사 하였다.
    1832년 5월 17일 푸조우를 떠나 5월 24일 닝포(Ning-Po, 寧波)에 도착하였다. 닝포 앞바다에 있는 조우산(舟山) 열도를 상세하게 조사하였다. 이때 귀츨라프는 열도 중 한 섬을 “귀츨라프 섬”이라 명명하였다. 1832년 6월 19일 오송(吳松)에 도착하였다. 린제이와 귀츨라프는 보트에 갈아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강 양쪽에는 창고가 즐비하였다. 더 올라가자 관리가 제지하여 이를 무시하고 더 올라가자 포탄(砲彈)이 날아왔다. 뒤에 있던 암허스트호는 이 포성을 듣고 환영의 예포로 생각하고 답례로 3발의 예포(禮砲)를 발사하였다. 상륙하여 관청 건물을 찾아가니 문이 닫혀 있어 열고 들어가니 관리들은 도망을 갔다. 얼마 동안 기다리니 해군 제독이 나타났다. 무역을 하자는 제의를 하자 베이징 황제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떠나가 버렸다. 그 사이 상인들로부터 여러 가지 정보를 얻고 전도지를 나누어 주니 기뻐하였다.

    3). 상하이(上海)에서 웨이하이(威海衛) 경유 한국 도착까지 1832년 6월 20일 상하이(Shang-hae, 上海)에 도착하여 18일간 정박 하였다. 이곳은 양자강의 하류로 옛날에는 강 하구에 있는 어촌이었는데 후에 국내 생산물의 집산지가 되었고, 외국 무역항으로 발전하였다고 했다. 암허스트호의 입항은 이미 예정되어 있어 새벽 4시 15발의 대포가 발사되었다. 동시에 중국 군함이 나타나 정지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암허스트호는 불응하고 부근의 상황을 계속 탐사하였다. 양 기슭의 토지는 목축에도 적당한 토질인데 주민들은 쌀농사만 짓는지 논만 보이니 이곳 주민들은 지혜가 없다고 평가하였다. 귀츨라프는 관리의 제지를 무릅쓰고 거리를 걸어 다니며 가정집과 상점을 돌아보았다. 교역 개시를 요청하였으나 베이징 중앙정부의 허가 없이는 불가하다고 하였다. 다만 필수품을 구입하는 허가를 받았으므로 이것들은 살 수 있었다.
    1832년 7월 8일 귀츨라프 일행은 상하이를 출발하여 7월 15일 산동반도(山東省)의 웨이하이웨이(Wei-hai-wei, 威海衛)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도 심한 포격을 받아 일단 후퇴하였다가 다시 상륙하였다. 항구 주변의 경치는 좋았으나 시가의 표정은 가난하게 보였다. 귀츨라프는 “우리가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을 떠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황해를 가로 질러 1832년 7월 17일 한국의 서해안에 도착하였다.



  • 귀츨라프 선교사의 첫 도착  

      개신교 한국 최초의 선교사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 1803-1851) 목사는 1832년 7월 17일 오전 10시 한국 서해안의 백령도 북서쪽에 위치한 황해도 장연군 몽금포리(조이진, 장산)에 도착하였다.

      귀츨라프 선교사가 한국에 처음으로 도착한 지명(地名)에 대하여는 여러 기록이 있다. 예를 들면 첫째, 영국 선적(船籍)의 암허스트호 함장 린제이(Lindsay, Hugh H.)는 “제임스 홀 경의 군도(Sir James Hall's Group, 大靑群島) 북쪽”라고 하였다.*1) 둘째, 귀츨라프 선교사는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바실만(Basil bay) 북쪽 장산(Chwang shan, 長山)”이라고 하였다.*2) 셋째, 조선정부 문서(日省錄)에는 황해감사 김난순이 장연현감(長淵縣監, 金星翼)과 조이진 만호(萬戶, 李民秀)의 보고를 인용하여 “몽금포(夢金浦)”라고 하였다.*3) 넷째, 조선왕조(純祖)실록에는 황해도 장연의 조이진(助泥鎭)이라 기록되어 있다.*4)

      위와 같이 귀츨라프 선교사 일행이 한국에 처음으로 도착하였다는 지명을 표기한 곳은 모두 다르게 쓰여 있다. 그러나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실제적으로는 황해도 장연군 관내(管內)의 동일 지역으로 다소의 거리상 차이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 최근에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한 지도(1:250,000)를 비롯하여, 고지도(古地圖)에 해당하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61년 발행)에 장연 관내에 장산(長山)과 조이(助泥) 지명이 표기되어있고, 동국여지도에도 장연 관내에 장산곶(長山串)이라는 지명이 수록되어 있었다.*지도 1,2,3 참조)

      린제이 함장의 보고서에 기록된 제임스 홀 경(卿)의 군도(Sir James Hall's Group, 大靑群島)란 1816년 9월 1일 영국의 지형 탐사선 알세스테(Alceste)호 함장 맥스웰(Maxwell) 대령이 한국의 서해안 지도를 작성하면서 그 중심 위치를 동경 124° 46′ 과 북위 37° 50′을 기준으로 제임스 홀 경의 군도라고 이름 지은 곳으로 린제이는 그 북쪽에 도착하였다고 하였다.*5) 귀츨라프가 기록한 바실 만(Basil bay)의 지명도 1816년 맥스웰 대령과 한국 서해안을 함께 탐사한 영국선 리라호(Lyra)호 함장 바실 홀(Basil Hall) 대령(아버지) 이름을 딴 지명이다. 바실 홀 대령은 1816년 9월 3일, 한국 서해안의 동경 126°, 북위 36° 20′지점을 중심으로 탐사하였으며, 그 북쪽에 장산(Chwang shan, 長山)이 위치한다는 것이다.*6)

      귀츨라프 선교사는 한국에 처음으로 도착하여 “거센 바람이 우리를 한국 땅에 오게 하였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중국 해안으로부터 그 수많은 위험한 고비마다 우리들을 보호해 주셨으니 진실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였다.*7) 그리고 린제이는 그의 항해기 에서 7월 16일 중국의 웨해위(Wei hei wei, 威海威)를 출발하여 가벼운 남풍으로 지지하며 항해하였으며 그 바람으로 한국으로 오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했다.*8)





  • 귀츨라프 선교사의 첫 복음서 전달

      이렇게 하여 개신교 선교사로 한국에 최초로 내한한 귀츨라프 선교사(목사) 일행은 황해도 장연군 몽금포리(夢金浦里)에서 부근에 정박한 한국 어선을 찾아가 처음으로 어부 두 사람을 만났으며 이들과의 필담(筆談)을 통하여 이곳이 몽금포 지역 장산(長山)이라는 두 글자의 한문 지명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귀츨라프는 처음 만난 두 어부에게 책 몇 권과 사자 무늬가 있는 단추를 선물로 주었다. 이 부분에 대하여 귀츨라프는 1832년 7월 17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우리는 바실 만 북쪽에 있는 장산에 닺을 내렸다. 주위가 적막에 싸여 마치 사막의 고요함 같았다. 우리가 위험을 무릅쓰고 해변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처음으로 만난 것은 허술한 어선과 남루한 옷차림을 한 이 지방에 거주하는 어부였다. 우리는 이 어부들과 말로는 통할 수 없었지만 한문 글씨로 필담(筆談)을 나눌 수 있었다. 우리는 그중 연상자에게 책 몇 권과 사자무늬가 있는 단추를 주었더니 아주 좋아 했다.”*9)    

      이렇게 하여 귀츨라프 일행과 한국인의 최초의 만남은 7월 17일 우호적으로 이루어 졌으며, 이 지방에 거주하는 어부에게 복음서 책이 처음으로 전달되었다. 귀츨라프는 이때 전달한 책을 구체적으로 어떤 책이라고 내용을 기록하지 아니하여 확실하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는 목사와 의사와 통역의 신분으로 한국 땅에 처음 상륙하였으며, 내한의 주목적(主目的)이 선교사로서 복음 전도를 위한 선교의 사명을 제일 목표로 삼았다고 볼 때 그가 처음으로 전달한 책에 복음서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책의 수량에 대하여 린제이 함장의 보고서에 의하면 이때 어민에게 주었다는 책은 몇 권이 아니라 “한 권의 책”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어부들은 책과 단추를 받고 기뻐하면서 자발적으로 답례의 선물로 그들이 잡은 “약간의 생선을 주었다”고 했다.*10)

      한편 조선왕조의 중요 문서 일성록(日省錄)에 기록된 황해감사 김난순(金蘭淳)이 조정(朝廷)에 보고(1832.9.5, 음 8.11) 한 내용에 의하면 7월 17일(음력6월 21일) 몽금포에서 처음 만난 어부는 조이진(助泥鎭)에 거주하는 김대백(金大伯)과 조천의(趙天義)라 하였다.*11) 따라서 귀츨라프 선교사가 1832년 7월 17일 한국 땅에 처음으로 내한하여 복음서를 전달한 장소(행정구역)는 황해도 장연군 몽금포리 이고, 대상 인물은 조이진에 거주하는 김대백 어부라고 추정 할 수 있다.

      또한 귀츨라프 일행은 같은 날 오후 5시, 암허스트호 모선(母船)을 떠나 작은 보트를 타고 몽금포리 조이진 부근 마을 입구까지 접근하였다. 그러나 주민들의 제지로 인하여 마을 안으로 진입하지는 못했다. 이 부분을 귀츨라프는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우리가 상륙하자 많은 주민들이 언덕으로부터 달려 왔다. 그들은 말총으로 만든 둥근 모자를 쓰고 중국인 것과 비슷하지만 보다 넓고 단추가 없는 바지저고리 차림이었다. 이들의 표정이나 행동은 매우 신중하였다. 그중 지팡이를 들은 지도자로 보이는 윗사람이“좌(tshoa, 座)”라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 하면서 우리에게 않으라고 권하였다. 그의 요구에 응하자 그는 연설을 길게 하였다. 우리는 그 연설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열변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다행이 한문을 아는 젊은이의 덕택으로 우리는 뒤 늦게 이 나라의 외국인에 대한 국법과 외국인이 도착했을 때 주어진 그들의 의무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설득을 하면 우리를 해변에 머물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우리가 언덕을 향해 마구 진입을 시도하자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우리가 마을 쪽으로 걸어가자 그들은 버티고 서서 한 발자국도 옮기지 못하게 막았다. 아마 그들의 초라한 오두막집을 우리에게 안보이려고 하는 것으로 짐작하고 우리는 더 이상의 시도를 단념하였다. 언덕에는 아름다운 들 백합과 들장미가 피어 있었다. 가꾼 흔적은 없었지만 이 땅이 그만큼 비옥하다는 증거이다. 우리가 언덕에서 내려가자 그들의 요구를 수용 해준 것에 만족하여 담배 대와 잎담배를 우리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하여 우리의 나이와 성과 어떤 나라에서 왔느냐고 물었다.”*12).

      이상과 같은 귀츨라프 선교사와 관련된 여러 가지 1차 자료를 중심으로 종합. 분석하여 판단해 볼 때 필자는 개신교 한국 최초의 선교사 칼 귀츨라프 목사는 중국의 위해위로부터 1832년 7월 17일 오전 10시 서해안 백령도 북서쪽에 위치한 황해도 장연군 몽금포리(助泥鎭, 長山)에 처음 도착하였으며, 이때 복음서를 한국인에게 처음으로 전달하였는데 그 대상 인물은 이 지역에 거주하는 김대백(金大伯) 어부라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