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경을 전해 준 사람은 귀츨라프(K.F.A.Gutzlaff) 선교사이다. 그는 중국 선교사로 1882년 7월 충청도 서해안에 상륙하여 우리나라 순조왕께 통상요구서와 성경전서 2권을 보내며 무역과 선교를 청원했으나 순조는 성경을 되돌려 보내며 거절하였다. 귀츨라프는 되돌아 온 성경을 받고 "황제께서 성경을 거절했으니 앞으로 반드시 후회할 날이 있을 것이라" 개탄한 후 중국에 돌아갔다는 말이 전해 오고 있다. 이러한 귀츨라프는 과연 어떠한 사람이었는가 그의 일생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귀츨라프의 일대기를 요약하여 소개한 휘트모아(1870~1952)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목사이며 교육가인데 조선예수교서회의 행정 총무로 일한 적이 있다. 이 분이 요약한 귀츨라프의 일대기를 리진호씨가 번역한 것을 소개한다.


       내가 처음 귀츨라프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1896년 10월 초순으로 한국선교사 생활을 하려고 배편으로 영국을 떠나 상하이 항구에 가까이 왔을 때였다. 상하이에서 67마일 떨어진 양쯔강 하구에 있는 귀츨라프는 선이 있는데 그 위에 아주 뾰쪽한 등대가 있다. 그가 64년 전에 선교사로서 한국을 방문하기 전에 명명되었다는 사실을 그 때는 몰랐다.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귀츨라프는 1803년 7월 8일 독일 포메라니아 핀쓰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소년시대에 공부하려는 열성이 대단히 높았고 선교사가 되려고 갈망하였으나 부모들은 너무 가난하여 가르칠 수가 없어 수테틴에 있는 마구상에 견습생으로 보냈다. 18세 때에 선교사ㅓ를 지망하는 간절한 사연을 시로 읋어 프러시아왕에게 드렸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할레에 있는 학교에 입학이 되었고 그 후에 베르린에 있는 선교사 양성소에서 국비로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소 한꺼번에 6개 국어를 공부하였다. 학교를 졸업하자 영국에 건너가 중국선교사이며 학자인 모리슨을 만났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중국이야말로 자기가 일할 터전이라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1826년 귀츨라프는 처음에 네덜란드 선교회 소속으로 옛 영국령 식민지의 말래카에 있는 중국선교사 대학에 파송되었다. 그는 자바 바타비아에 파송되어 1827년 1월 6일에 그곳에 상륙하였다. 이곳에서 중국 주민과 함께 철저한 공부와 교제를 하여 중국어 연구에 큰 발전을 가져왔다. 1828년에 네덜란드 선교사와 인연을 끊고 본래의 사명인 중국선교를 결심하였다.(이 때 런던선교회로 옮겼다.-역자주) 그는 그러나 사이암 방콕으로 가서 (1828.8.23) 그곳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 부부는 사이암말로 많은 책을 번역하였고 코친차이나(Cochinam-China;Viet Nain 최남부 지명 - 역자주) 사전을 편찬하였으며 성경 단편을 5개 지방어로 번역하였다. 그는 1831년과 1834년 사이에 중국.사이암.조선과 류루큐열도 연안을 향해하였다. 이 항해에서 그는 처음으로 중국인으로 변장하였으나 그 후는 교역을 하려는 목적으로 동인도회사에서 보낸 영국 선박 로드 암허스트호의 통역관 선의(船醫), 선목(船牧)으로 일하였다. 이 배는 1832년 2월 25일 마카오를 출발하였는데 통상을 할 나라를 찾자는 항해였다. 그들은 될 수 있으면 영국과 인도의 면직물을 판매할 새 시장을 개척하고자 한 것이다. 그들은 자기방어 이외에는 무력을 쓰지 아니하였으나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토착민의 환심을 사는 데 힘썼다. 그 배는 고초(Kiaochao)를 방문하였고 산뚱현을 찾은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가 되었다. 드디어 웨이하이웨이에 상륙은 하였으나 입국을 허가하지 아니하여 조선으로 향하여 뱃머리를 돌렸다.
  •  1832년 7월 17일 그들 앞에 "조선"이 나타났다. 그는 중국과 타타르(몽고족의 한 갈래-역자주)와 조선과의 교역은 만두와 타타르 전방 도시인 평황칭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배는 배질만(Basil's Bay) 북쪽의 장상도에 닻을 내렸는데 배질만 입구는 전라북도와 충청도의 분계선이다. 그 승무원 전체의 통역인 귀츨라프는 한문을 사용하여 아주 쉽게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다. 그래서 조선사람은 처음에 친절하게 응대하지 아니하였고 입국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는 한문이 유식하고 병을 고칠 재주가 있어 몇 군데 섬과 내륙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전도문서와 단추와 약품을 나누어 주었고 감자를 심어 재배법을 가르쳤다. 7월23일에 물개를 총으로 쏴서 잡았다고 하였다. 어느 곳에서는 어부들에게 초청되어 대접을 받기도 하였다. 조선 연안에 가까이 있을 때 안개 때문에 당황하였으나 그들의 방문기간은 우기였던 것이다.
       7월 25일 그들은 강경(Kan-Keaung)이라는 더 좋은 정박지로 안내되었는데 그때 조선 관리가 찾아왔다. 귀츨라프는 관리들이 은둔의 왕국에서 수세기 동안 내려오는 관습에 따라 손님들을 헤변에 주저 앉히려고 시도하였으나 이 때 여러 번 책을 나누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관리들은 국왕에게 드리는 선물인 유리그릇, 옥양목, 모직물 그리고 성경 한 질과 전도지를 받았다. 며칠 동안 협상하였으나 이 선물은 결국 되돌아 왔다. 토칙민 중에서 지식층의 몇 사람은 유럽에서 발행된 책을 중국어로 번역한 지리와 산술을 비롯한 여러가지 선물을 받아서 윗사람을 어렵게 만들었다. 귀츨라프는 기독교나 카톨릭 개종자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거짓말을 하는 지방장관은 모든 학문을 부정하고 그리스도 신앙의 존재까지도 부인하였다. 그러나 달레(Dallet, 한국천주교회사의 저자-역자주)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원산도에 머물고 있는 동안 토착민 크리스찬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라는 한문으로 쓴 깃발을 보고 마음이 끌려 갑판까지 왔다. 개신교 목사로부터 경례를 받았으나 그 인사의 뜻을 알지 못하여 신도들은 속은 줄 알고 해변으로 달라나서 다시는 배를 찾아오지 아니하였다.
       8월1일 이 백성들에게 두드러지게 변화가 일어났다. 그들은 모든 것을 사양하였고 관리들이 교제를 금지하였는지 선물은 받지 아니하고 질문에 대답도 안하였다. 8월9일 조정 행정관이 도착하였으나 방문자들은 그를 통하여도 또한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었다. 얼마 후, 이 최초의 개신교 한국 선교사는 한 달 가까이 이 백성과 함께 지낸 다음에 해변을 떠나 비누와 성경을 갖고 깊숙이 들어갔다. 귀츨라프는 이 민족은 종교가 없고 가난에 쪼달리며 더럽고 술과 퇴폐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였다. 8월17일 그의 배는 제주도를 지났으니 마지막으로 조선을 보았다. 1832년에 한 개신교 선교사의 이 조선 방문은 최초의 외국 로마카톨릭 신부의 도착과는 4년 전의 일이다. 1836년 프랑스 신부인 모방(Pierre Maubant)이 험란한 여행 끝에 서울에 도착한 이 전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1707년 그러니까 귀츨라프보다 125년 전에 뻬이징으로부터 몇 프랑스 신부들이 조선 북쪽 지방에 도착하였으나 "은둔의 왕국"은 입국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1783년 귀플라프보다 반세기 전에 한국의 한 젊은이 토마스 김이 뻬이징에 있는 포르투갈 감독 글로리아에게 개종하여 기독교(로마카톨릭)를 조선에 소개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제 귀츨라프의 만년의 생애에 대하여 몇 가지 기술하고자 한다. 1834년 모리슨 박사가 별세하자 귀츨라프는 주중 영국대사의 통역겸 비서로 임명되었고 나중에는 무역 관리자가 되었는 데 죽을 때까지 그 자리에서 일하였다. 1835년에 그는 영국의 대리인 "합동총무"에 임명 되었다. 1842년에 아편전쟁과 잔징에서의 평화협상에서 그는 자신으 중국지시과 언어와 풍습을 많이 알기 때문에 가치있는 봉사를 하였다. 의술이 있고 박식하기 때문에 중국인에게 존경과 신망을 얻었다.
       1844년 토착민 선교 훈련원을 설립하고 48명의 남자를 훈련시키려 보냈다. 이 시도는 귀츨라프와 그의 동조자에게 기독교를 토착민 전도요원들에게 시험을 한 것으로 어느 전기 작가가 말한 것과 같이 "시기 상조였고 실패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중국 종교 부흥과 기독교 문화를 위한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은 교회사에 크게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전기 작가가 볼 때 선교 훈련원의 실패는 너무 많은 인원을 뽑았고 시험이 충분하지 못한 데 있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그의 번역 사업은 현저하다. 사이암어로 신약성서 중 최소 한 권을 번역한 것이외에 중국 개척 선교사의 한 사람인 메드허스트와 합동으로 성경을 원리(Wenli)로 번역하였다. 여기에 난파된 일본 선원의 도움을 받아 요한복음을 일본어로 번역한 것이 더 있다. 그는 1849년에 영국, 독일, 그리고 유럽의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연설을 하였는데 듣는 자마다 중국에서의 선교 성과에 대하여 새로운 충격을 받았다. 1851년에 중국에 돌아와 같은 해 8월 9일 홍콩 빅토리아에서 죽었다. 이리하여 극동의 비기독교 민족을 향한 어느 최초의 선교사의 25년 간의 어려운 개척선교사업은 끝이 났다. 비천한 가문에서 태어났고 소년시절에 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나 귀츨라프는 줄기찬 노력으로 많은 외국어를 마스타하였고 그 후계자인 수 백명의 선교사의 길을 열어 주었으니 그들은 그가 용감하게 개척한 선교 사업을 실행하여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