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 명 : Karl Friedrick August Gutzlaff
  • 한국명 : 귀츨라프(기독교대백과사전), 구츨라프, 구쓰라프 등 총17종 표기
  • 조선명 : 甲利(*순조실록)
  • 중국명 : 郭實뢰
  • 홍콩명 : 吉士立(*홍콩에는 吉士立街가 있음)
  • 호 명 : 善德산(*일본어 성서에서 사용)
  • 국 적 : 독일(프토시아의 포메라니아(Pomerania)의 작은 피리츠(Pyritz)에서 태어남)
  • 계 보 : 폴란드계 유태인
  • 출생일 : 1803.7.8(아버지 Jona Jacob Gutzlaff와 어머니 Maria Elizabeth Gutzlaff의 외아들)
  • 유년시절 : 어머니는 4살에 아버지는 22살에 별세
  • 환경과교육 : 마구상을 하는 아버지의 교육으로 귀츨라프는 어려서 믿음과 신학의 기초를 길러옴
  • 1차결혼 : 1830년에 영국여성 Miss Mary Newell과 결혼(부인은 태국 전도 중에 병으로 사망)
  • 자 녀 : 쌍둥이를 낳았으나 하나는 부인과 함께 사망 그리고 남은 아이도 얼마 안가서 사망
  • 2차결혼 : 1832년에 Miss Mery Manstart와 결혼하였으나 17년 후인 1849년에 사망.
  • 3차결혼 : 1849년 미스 가브리엘과 결혼
  • 사 망 : 1851.8.9 홍콩에서 만48세에 급사
  •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Gutzlaff, Karl Friedrich August, 郭實獵, 1803-1851)는 1803년 7월 8일 독일 프로이젠 제국의 한 작은 마을 프릿츠(Pyritz Pommen, 현재 폴란드 Pyrzyce)에서 아버지 J. J. 귀츨라프(Gutzlaff, Johann Jacob)와 어머니 엘리자베스(Marie Elisabeth) 사이에서 외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네 살 때 1807년 5월 9일 별세하였으며, 아버지는 다시 오케르트(Ockert, Calorina L. F. )와 1808년 7월 7일 재혼하였다. 그리하여 귀츨라프는 어린 시절을 계모 밑에서 성장하면서 학대를 받고 육체와 정신 발달에 상처와 고통이 있었다.

     그는 여덟 살 때까지 독일의 할레(Halle)에서 일어났던 경건주의자 프랑케(Francke H.)가 설립한 학교(프랑케슐레)에서 공부하다가 가세(家勢)가 기운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프릿츠(Pyritz) 공립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리고 가정에서 아버지로부터 신앙적 교육과 사회적 교양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어릴 때부터 설교자(Prediger)가 되는 꿈을 품고 있었으며, 베를린 선교신학교 입학 당시에도 장래의 포부를 묻는 질문에 설교자가 되고 싶다고 하였다.

     13살 되던 1816년, 귀츨라프는 출생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스테틴(Stettin,현 폴란드 도시) 도시로 옮겨 가죽 허리띠를 만드는 기술자가 되기 위한 직업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 직업 교육에 만족할 수 없었으며, 학업에 대한 열정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이 무렵 그는 바젤(Basler)선교회가 발행하는 "선교잡지"를 접하면서 선교의 꿈을 키우게 되었다. 그리고 1818년 어느 설교자로부터 선교에 관한 격정적인 설교를 듣고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그가 17살 되던 1820년, 스테틴에는 프로이젠 제국의 군대 열병식(閱兵式)에 당시의 황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Friedrich Wilhelm Ⅲ)가 참석하게 되었다. 이때 귀츨라프와 그의 친구 헤르만(Hermann)이 함께 지은 “충성의 시(Huldigungs-gedicht)”가 황제에게 헌정되었다. 귀츨라프는 이 시를 통하여 천재성을 인정받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황제로부터 계속 공부를 위한 재정 지원의 약속을 받았다. 그 결과 1821년 1월 19일 열린 내각회의에서 귀츨라프를 베를린 신학교에 교육 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황제는 귀츨라프가 베를린 신학교(Missionsschule in Berlin)에서 공부하도록 연 500 탈러(1 Taler는 독일의 옛 3마르크 은화 임.)의 지원금을 보냈다. 그리하여 1821년 4월부터 베를린 신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귀츨라프는 베를린 신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는 동안 J. 예니케(Janicke, Johanenes) 교장의 신앙 지도에 영향을 받았으며, 선교에 대한 확실한 소명을 갖게 되었다. 예니케는 루터파 교회의 담임 목사였고, 프로이젠 성서공회와 기독교서적 중앙협회를 창설한 인물이었다. 귀츨라프의 신학교 생활은 침상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더 이상 낙심하지 아니하고, 학업을 시작하기 위해 자신의 책상에 않아서 진실하며 조용히 명상하듯 기도하는 자세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넘치는 학구열과 지칠 줄 모르는 정열로 6개 국어를 습득하였다.

     1823년, 귀츨라프는 베를린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베를린대학교(현 베를린 훔볼트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이 대학의 수학은 중병으로 인하여 중퇴하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네덜란드 선교회(Netherland Missionary Society)에서 선교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선교사의 길을 자원했다. 그의 중병도 이 무렵 나았다. 이 치료의 사건을 두고 그의 주치의는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하고 하였다. 병이 치료된 후 다른 2명과 함께 1823년 5월 라인 강의 하구에 있는 네덜란드의 항구 도시 노틀담(Rotter- dam)으로 향했다. 이는 그가 그렇게도 희망하고 준비했던 선교사의 삶의 시작이었다.*7) 그리고 복음주의 루터파 소속 목사가 되어 네덜란드 선교회 소속으로 3년 동안 첸델링게노샤프(Zendelinggen- ootschap)에서 사역하였다.
  • 베를린에서 만20세 때 친구에게 쓴 편지 : 지금이야말로 여러 민족이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갈망하는 소리가 높아 가고 있어 여기에 응하여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소원이 사람들 간에 세차게 움직이고 있는 때다. 미신과 어둠 속에서 헤매는 사람들에게 빛을 주고자 하지 않는 크리스챤이 어디 있을 것인가? 이 믿음을 바탕으로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계를 향하여 전하는 선교사가 되고 싶은 것이다.
  • 23세 선교를 떠날 때 그의 스승에게 쓴 편지 : 들판은 벌써 추수의 계절이 되었습니다. 풍년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할 사람은 얼마 안됩니다. 암흑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많은데 어찌하여 구라파의 일손은 적단 말입니까? 구라파는 그등에게 빗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 독일 제국이여! 언제나 이웃 나라와 형편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또한 구라파의 해방을 부르짖는 독일이여 왜 암흑과 미신과 부도덕 안에 있는 이교도의 해방에 관하여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는 해외에 전도자로 부름을 받아 가는 것을 행복하게 여기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올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된 이 들 이교도의 사람들과 다시 만나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 24세 때 바타비아항에 도착 후 친구에게 쓴 편지 : 나는 스탓데잉에 있을 때 중국어, 말레이아어, 아랍어 등을 말할 수 있으리라고 마음 먹은 일이 있다. 나는 선교사로서 부룸 받은 것을 감사한다. 지금 나는 매일 중국어 책을 읽고 쓰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가까운 시일 내에 나는 친구와 함께 보르네오, 사이암을 방문할 예정이다. 거기서 별 어려운 문제가 없다면 일본 방문의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 28세 때 텐진으로 가는 악천 후 속의 배위에서의 기도 : 나는 나의 무능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주위에는 무서운 장애가 갈길을 막고 방해한다는 것도 잘 안다. 지금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주님 뜻대로 쓰십시오." 라는 말 뿐이다.
  • 아모이 항구에서 1000톤의 암허스트호를 향하여 날아오는 대포를 보고 : 선교사 귀츨라프가 눈을 깜박깜박하면서 " 전 중국의 병선 1천척을 가져와도 우리의 브리게이트 전함(The Frigate Battle Shik) 한 척을 당할 수 없다.
  • 29세 때 조선에 와서 새벽이 오기를 빌면서 : 조선 국왕이 처음에는 거절하였던 성서를 지금 갖고 있는지 또한 읽고 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강경의 관리와 주민들은 성서를 받았다. 이 첫 전도는 보잘 것 없지만 하나님께서 축복하여 주실 것을 확신한다. 조선에 어둠이 가고 속히 새볔이 와서 밝은 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 조선을 떠나는 길에 제주도를 지나면서 : 우리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모양을 한 섬들을 지나갔다. 제주도는 매력이 넘치는 곳이다.....이곳에 선교를 정착하는 문제를 뉴질란드나 래브라더나 그린란드에 복음을 전한 최초의 선구자가 선교한 것보다는 덜 위험하다는 것을 확신한다. 한 가지 진실-이 섬들은 기독교를 수용하지 못할 아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 30세 세번 째 북중국 항해를 마치고 마카오로 되돌아 가면서 : 중국에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하루라도 빨리 전도되기를 기도한다.
  • 조선의 왕정 ; 귀츨라프가 조선을 방문했던 때, 조선의 국왕은 순조였으며 조선의 제23대 왕(재위 1800~1834)으로서 그의 일대기를 간단히 소개함으로서 그 시대의 역사적 배경을 조명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순조는 김조순 및 외가 인물들의 권력 강화에 맞서 선왕인 정조의 여러 정책을 모범으로 하여 국정을 주도하려고 노력하였다. 암행어사 파견,《만기요람》편찬, 국왕 친위부대 강화, 하급 친위 관료 육성 등의 방식으로 국정을 파악하고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려 했다. 이름은 공(?). 자는 공보(公寶). 호는 순재(純齋). 묘호는 당초에 순종(純宗)이었으나 1857년(철종 8)에 개정되었다. 묘호 외에 6차례에 걸쳐 존호(尊號)가 바쳐져 정식 칭호는 70자에 이른다. 정조의 후궁인 박준원(朴準源)의 딸 수빈(綏嬪)에게서 부왕의 2남으로 태어났으나 1남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일찍 죽어 1800년(정조 24) 왕세자에 책봉되고 그해 6월에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즉위와 함께 영조비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수렴청정이 실시되어 경주김씨 김관주(金觀柱)와 심환지(沈煥之) 등의 벽파가 정치를 주도하였으나, 1803년 말에 친정을 시작한 후 몇 단계에 걸쳐 그들을 축출하였다. 그 후로는 정조의 결정에 따라 장인이 된 김조순(金祖淳) 및 외가 인물들의 권력 강화에 맞서 선왕의 여러 정책을 모범으로 국정을 주도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19세 되던 재위 8년 이후로 정승 김재찬(金載瓚)의 보필을 받아 실무 관원과의 접촉, 암행어사 파견, 《만기요람(萬機要覽)》 편찬, 국왕 친위부대 강화, 하급 친위 관료 육성 등의 방식으로 국정을 파악하고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래 강화되어 왔고 영조 ·정조대의 탕평책에도 꺾이지 않은 소수 명문 가문이 주도하는 정치질서를 개편하지 못하고 건강이 상한데다가, 1809년의 유례없는 기근과 1811년의 홍경래의 난에 부딪히면서 좌절하게 되었다. 그 이후 국정주도권은 외척간의 경쟁에서 승리한 김조순에게 돌아가고 이른바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자리잡음으로써 적극적인 권한행사를 하지 못하였다. 1827년에는 오랫동안 계획해온 대로 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에게 대리청정시키고 국정 일선에서 물러났다. 세자는 김조순 일파를 견제하면서 의욕적으로 정치의 개편을 추진하였지만 3년 후에 급서함으로써, 다시 순조가 정사를 보게 되었다. 그 이후 죽을 때까지 태도와 권한이 위축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1835년(헌종 1)에 세실(世室)로 모셔졌으며, 저술은 《열성어제(列聖御製)》에 묶여진 데 더하여 문집으로 《순재고(純齋稿)》도 있다. 능은 경기 광주의 인릉(仁陵)이다.
  • 조선의 관료 ; 귀츨라프가 본 당시의 관료 들을 조명할 수 있는 영국선박에 양식제공을 약속받았다는 칼 귀츨라프의 1832년 8월 10일의 일기 중에서..
    우리는 높은 고관에게서 약속한 양식을 배달하여 주기를 다짐하였으나 보내주지 아니하였다. 사람들이 뱃전에 왔는데 그들은 체포되어 참혹하게 몽둥이로 얻어 맞는 사건이 생겼다.
    우리는 닻을 내리고 있는 근처에서 가장 큰 섬 언덕에 올라가서 산봉우리에 있는 성첩(城堞)을 조사하였다. 이 성첩은 돌벽으로 되어 있고 사이는 흙으로 채웠으나 총이나 군사 장치는 없었다. 이 섬에는 사람들이 조밀하게 살고 있으며 개간도 잘 되어 있었다. 주민들은 우리를 보자 성첩을 보지 못하도록 경계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언덕까지 뛰어 올라 우리의 사방을 둘러 쌓았다. 우리가 마을로 들어가자 그들은 빈틈없이 호위하였고 몇 번이나 엉뚱한 길로 인도하였다. 이렇게 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 같다. 처음에는 아주 친절하였고 자기들 권한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세세한 서비스를 다 하였기 때문이다.

  • 조선의 지형과 전도 ; 아름다운 제주도를 보면서 쓴 칼 귀츨라프의 1832년 8월 17일의 일기 중에서..
    우리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모양을 한 섬들을 지나갔다. 최남단에 있는 제주도(북위 32도51분, 동경126도23분)
    는 매력이 넘치는 곳이다. 이곳은 개발이 잘 되었고 교통이 편리하여 무역관을 짓는다면 일본, 조선, 만주, 타타르 그리고 중국과 교역하기가 아주 쉬울 것이다. 만일 이것이 안되면 이 섬을 선교 기지로 할 수 없을까? 중요한 지점인 제주도에 선교관을 세운다면 쇄국정책을 쓰느 조선 조정에 치명적인 충격을 주지 않겠는가? 조선 조정이 얼마만큼 이 섬에 대하여 억제 정책으 쓸지 나는 잘 모르갰으나 이곳에 선교를 정착하는 문제를 뉴질랜드나 래브라더나 그린란드에 복음을 전한 최초의 선구자가 선교한 것보다는 덜 위험하다는 것을 확신한다. 한가지 진실-이 섬들은 기독교를 수용하지 못할 아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 ;조선의 백성 ; 고관은 사치 백성은 비참했다는 칼 귀츨라프의 1832년 8월 1일의 일기 중에서..
    ....우리가 만난 사람들은 피부가 때로 덮여 있었다. 한 달이나 씻지 않은 사람도 많았고 이가 온 몸에 득실거렸는데 우리가 보는 앞에서 서슴지 않고 잡아 죽였다. 그들은 거의 갖은 것이 없었다. 가정 용품은 솜씨없는 것이었고 대부분 흙으로 빚은 것으로 대단히 조잡한 제품이었다. 이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가 이곳에 있는 동안 한 개의 동전도 보지 못하였다. 고관들은 호화롭게 입고 한정된 사회에서 허용할 수 있는 모든 편의를 다 누리고 있으니 일반 백성들은 비참함을 알아차릴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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